7100 이 땅의 삶은 삶 자체에 목적이 있는가 또는 목적을 위한 수단인가?
1958년 4월 23일: 책 75
인간으로 이 땅의 과정을 가는 자체에 목적이 있으면, 이 과정은 올바른 이유가 없을 것이다. 또는 너희 사람들이 이 땅의 과정의 올바른 이유를 찾는 일이 어렵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아주 분명하고 크게 서로 다른 사람들의 운명을 보고, 실제 어렵고 고난이 충만하고, 불쌍한 삶에 어떠한 목적이 있는지에 관한 질문이 너희 안에서 항상 또 다시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가 삶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고,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면, 너희는 즉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의 이 땅의 운명이 같다면, 모든 사람의 이 땅의 삶이 조화 가운데, 염려가 없고, 기쁨과 세상 행복으로 구성이 되고, 이웃 사람의 삶과 다른 점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실제 이 땅의 삶 자체의 외에는 다른 깊은 목적이 없다는 믿음을 가질 것이다.
너희가 진지하게 이해 관해 생각하면, 너희는 더 이상 이런 설명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깊은 이유를 구하려고 할 것이고, 너희는 이 이유를 확실하게 찾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이에 대한 답변을 얻기 위해 너희가 단지 질문하는 일 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질문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단지 창조주의 기분대로 이 땅의 삶을 살게 된 것으로 만족 해버리면, 진실로 현명하다는, 올바른 이성을 가졌다는 증명을 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존재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은 전적으로 목적이 없는 것을 생성하기 위해 실제로 그의 시간과 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마찬가지로 자신을 유지하는 일 외에는 전적으로 다른 목표가 없는, 그러나 이 가운데 자신이 존재하는 기간을 정할 수 없는 피조물로 여김 받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 땅의 삶은 삶 자체에 목적이 있는가 또는 목적을 위한 수단인가? 자신 안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 일이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줄 것이다.
너희 사람들에게 무조건 믿으라고 절대로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은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 이성을 사용할 수 있다. 너희는 너희에게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에 대해 모든 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너희는 깊이 생각해 보는 일을 통해 너희가 영접할 수 있는 결과에 도달할 것이다.
너희는 너희 사람들에게 아직 숨겨져 있는 깊은 깨달음에 관한 그러나 너희에게 숨겨져 있을 필요가 없는 지식에 관해 생각하는 모든 일이 축복이 됨을 확신할 수 있다. 사람의 이 땅의 삶의 목적을 헤아려보는 일이 바로 이러한 깨달음이다. 왜냐하면 이런 깨달음은 증명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 것이고, 그러나 사람에게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진지함이 있으면,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사람의 이 땅의 삶이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임을 선명하게 깨닫게 되었다면, 그 사람 안에 항상 더 많은 질문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진정한 목적을 구하게 될 것이고, 이제 자신의 과제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는 유일하게 이 땅의 삶을 돌보는 일만으로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모든 일어나는 일과 체험하는 일을 목적 때문인 것으로 깨달을 것이고, 이제 그를 아주 만족시키는 영적인 자세를 찾고, 이를 유지할 것이다. (195년 4월 23일) 이 땅의 삶의 목적을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사람의 의식적인 삶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그의 생각이 이제 비로소 그가 도달하려고 시도하는 목표를 향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비로소 스스로 혼에 대한 작업을 손대기 시작할 것이고, 비록 그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 땅의 과제를 성취할 수 있을 지라도, 이제 비로소 세상적인 목적은 뒤로 물러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삶에 대한 자세를 축복하고, 새로운 측면을 그에게 알려줄 것이다. 그의 생각이 새로운 측면을 분별해보고, 그를 높은 곳으로 인도한다.
목적을 의식하는 이 땅의 삶은 절대로 헛된 삶이 될 수 없고, 영적인 성공을 해야만 한다. 반면에 단지 삶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는 사람은 어떠한 영적인 유익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 사랑을 행하려는 의지가 있으면, 그는 스스로 실제 자신의 이 땅의 삶의 목적에 관한 질문할 것이고, 그러면 생각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의 삶의 목적을 아직 깨닫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처럼 그에게 사랑을 행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위로 성장을 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면 그 사람의 혼은 그가 육신을 입기 시작한 단계의 상태로 머문다. 그러면 그의 이 땅의 삶은 전적으로 헛되게 살게 된다. 그러면 그는 자신에게 최고의 성공을 줄 수 있는 큰 은혜를 헛되게 만든다.
그러나 사람이 한가지 목적 때문에 이 땅의 과정을 간다는 깨달음에 도달하는 일이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한 생각과 다른 생각을 저울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 스스로 판단을 내릴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진지하게 생각하면, 그가 자연의 창조물 가운데 어느 정도 법적인 질서 안에 있는 목적을 깨달을 수 있고, 그가 자신을 최고로 발달된 창조의 작품으로써 자신에게 이 질서를 적용시켜야만 하기 때문에, 그는 전적으로 확실하게 이런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슬기롭다고 할 수 없는 견해를 가진, 아주 생각에 제한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이 땅의 삶의 목적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에게 이 땅의 삶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삶의 목적을 깨닫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이런 책임을 부인할지라도 그러나 자연의 창조물 가운데 자연의 법칙에 대항해 어기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질서에 대항해 어기는 일에 대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게 되지 않는다는 충분한 증거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에게 어떤 질서를 적용시켜야만 한다. 그는 자신이 이런 질서의 법칙에 포함된 것으로 느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것을 생성시킨 분 앞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비 양심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 수 없다. 대신에 그는 하나님의 질서의 법칙에 자신이 순응하려고 시도해야만 한다.
그는 법을 세운 한 분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는 법을 세운 분에 대해 자신의 책임을 느낄 것이다. 법을 세운 분을 인정하지 않으면, 사람은 주님에 대한 모든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게 느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아직 분명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권세 아래 있다.
왜냐하면 이 세력은 사람들에게 항상 이 땅의 삶이 그에게 어떠한 성장도 줄 수 없게 영향을 미치려고 시도하고,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과 목표에 대한 모든 믿음이 사라지게 함으로, 다시 영원한 기간에 걸쳐 그에 대한 자신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영향을 미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아멘